[정보사회 新문화만들기]다음카페 '라면천국'의 무료 라면봉사
"한국에도 이렇게 고마운 사람들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중국 길림성에서 왔다는 임 모씨(74)는 '외국인 노동자의 집(서울 가리봉동)' 식당 문을 나서며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그냥 라면 한 그릇 대접받았을 뿐인데, 그의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리고 어눌한 한국말로 "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대체 무엇이, 이 노인을 어린아이처럼 울먹이게 만든 것일까.

임금이 높다는 한국에서 몇 년만 일해 임금을 모은 뒤 중국으로 돌아가 편안한 노후생활을 하겠다는 '코리안 드림'을 안고 아내와 함께 한국에 왔지만, 임씨의 꿈이 깨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공사판과 식당, 공장 등을 찾아다녔지만 '65세 이상에게는 일자리를 줄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생활비를 마련할 길이 없는데 중국에서 가져온 돈마저 바닥나자 아내와도 떨어져 살게 됐다. 아내는 어렵사리 취직한 식당에서 기거할 수 있었지만, 그는 교회 등이 제공하는 무료 숙소를 전전해야 했다.

그에겐 그리 따뜻한 땅이 아니었던 한국이었기에,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토요일 아침에 나온 젊은이들의 웃는 얼굴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진 모양이다. 오랜만에 접하는 타인의 친절을 통해, 고향의 이웃들을 떠올린다고 임씨는 말한다.

◇ "잘 먹겠습니다"

지난 14일 오전 10시경, 외국인 노동자의 집 구내식당은 분주해졌다. 점심시간은 2시간이나 남았지만 식사 준비는 벌써 시작됐다. 백 개가 넘는 라면 봉지를 뜯어 내용물을 대야에 모아 담고, 주방에서는 설거지 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는 구석부터 쓸고 닦기 시작한다. 식당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평소와 딱 하나가 다르다. 오늘만은 식당 아주머니들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고무장갑을 끼고 앞치마를 입는다.

다음 카페의 라면 동호회 '라면천국'과 대학 동아리 국제시민봉사회(SCI)의 회원들은 매달 한 번씩 이곳을 찾아 이주노동자들에게 무료로 라면을 대접하는 봉사활동을 벌인다. 고급 음식은 아니지만, 평소에 양질의 반찬을 제공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나름 별미로 받아들여져 호응이 제법 크다. 봉사활동이 몇 년째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행사 때마다 라면회사에서 무료로 라면을 지원받고 있다.

점심시간이 시작되자 중장년의 남녀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중국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일종의 '차이나타운'이 돼 버린 지역 사정 때문에, 대부분은 중국 출신 교포들이다. 80석 남짓한 좌석들이 순식간에 들어차고 라면 서빙이 시작되자 차가운 공간에 뽀얀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최저기온 영하 5도의 쌀쌀한 날이라 냉기가 감돌던 식당에 슬슬 온기가 감돈다.

여기저기서 '맛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이날의 라면 요리법은 약간 독특한 것이었다. 어떻게 끓이면 더 맛있는 라면을 먹을 수 있는지를 곧잘 토론한다는 라면 동호회답게, 이들은 이날도 모종의 '실험'을 감행했다. 카레라면에 브로콜리를 듬뿍 썰어 넣은 것. 반응이 괜찮은 것을 보니 실험이 성공한 모양이다. "잘 먹었다"며 개인적으로 인사를 하고 가는 사람들이 눈에 종종 띄었다.


◇ "자기 만족 위해 왔다"

쉴새없이 라면그릇을 나르던 안선아 씨(인하대 4학년), 미소를 잃지 않고 서빙을 계속하는 솜씨가 웬만한 패밀리레스토랑 종업원 못지않아 보인다. 여기서만 만 1년째 봉사활동을 계속했다니, 일이 손에 익을 만도 하다. 나름 베테랑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화이트데이에 여기 와 있으면 남자친구가 서운해 하지 않겠느냐고 물으니 "데이트는 저녁에 하면 되니까요"라며 배시시 웃는다. 사실은 지난달 밸런타인데이에도 봉사하러 왔다고 한다. 매달 둘째주 토요일이 봉사일인데, 공교롭게도 두 달 연속으로 기념일과 겹쳤다는 것.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선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봉사로 얻는 보람과 같은 '자기 만족'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병원에서 행정직으로 일한다는 박소라 씨(30대)는 "대학 때 해보지 못했던 봉사활동을 하고 싶었다"며 "자기 만족을 위해 왔다"고 말했다.

안씨도 "어르신들이 '잘 먹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고마워하실 때 큰 힘이 된다"며 "이것 때문에 1년째 봉사를 계속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봉사에 같이 참여한 이선민 씨(숭실대 4학년)도 "인사를 들을 때 뿌듯함을 느낀다"고 전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저 당연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부동산 중개업을 한다는 임광호 씨(49)는 "사회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사는데, 이를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며 자신의 활동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사양했다. 임씨 가정에서는 봉사가 일종의 '가풍'이 돼 버린 모양새다. 아내와 같이 봉사를 다닌 지 몇 년이 넘었고, 지금은 군복무 중인 아들도 입대 전까지는 가족과 함께 봉사활동에 꾸준히 참여했다고 한다.

봉사자들의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는 큰 힘이 된다고 중국 동포들은 입을 모았다. 연변 지방 출신으로 현재 외국인 노동자의 집에 거주 중인 박길성 씨(65)는 "(라면천국 같은 이들의) 봉사 덕에 생활비가 덜 든다"며 "일거리가 없는 입장에서는 매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박씨는 입국한 뒤 몇 달만에 뇌종양 판정을 받고 2차례의 수술을 받아 그간 모아놓은 자금을 모두 소진한 상태다.

흑룡강성 출신의 김화순 씨(49)도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주는 분들을 만나 반갑다"며 "평소에 자주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늘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